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문단 편집) === 첫사랑과 우울증 === 1881년에 [[불가리아 공국]]의 [[알렉산더르 1세]][* 불가리아 공국의 군주로 추대되기 전에는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자였다.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가 [[율리아 하우케]]와 [[귀천상혼]]하여 낳은 아들로 형이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다. 즉,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작은 외할아버지이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작은 아버지가 된다. 형 루트비히는 빅토리아 공주의 사촌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했고, 동생 하인리히는 막내 이모인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했다. 알렉산더를 불가리아의 군주로 추천한 사람은 그의 고모부인 [[알렉산드르 2세]]다.]가 프로이센을 방문했다. 빅토리아 공주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두 사람의 혼인을 제안했다. 당시 15살이었던 빅토리아도 매력적인 알렉산더르 1세에게 반했고 그와의 결혼을 기대했다. 알렉산더르와 빅토리아는 어머니의 허락 아래 몰래 약혼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르가 추정하길 빅토리아의 언니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샤를로테 공주]]가 퍼뜨린 소문 때문에 더 이상 약혼은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 수상과 할아버지 [[빌헬름 1세]], 오빠 [[빌헬름 2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알렉산더르 1세는 팽창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차르]][*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사촌인 바텐베르크 가문의 남매들에게 굉장히 냉정했다.]에게 밉보인 상태였기 때문에, 그와의 혼인은 자칫 독일 제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알렉산더르 1세는 귀천상혼 가문 출신이였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였다.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이 혼사에 굉장히 집착했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미온적인 반응이었기에 빅토리아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더르 1세가 불가리아 공국의 군주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빅토리아는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 빌헬름 1세, 오빠 빌헬름 2세,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반대로 결혼이 성사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알렉산더르를 좋게보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만이 이 결혼에 집착해 알렉산더르만 난처해졌다. 그나마 할아버지 빌헬름 1세가 사망하자 약혼에 진전이 있어보였다.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약혼을 허락하려 하자 이 둘이 약혼한다면 비스마르크는 사직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상하리만큼 이 결혼에 집착하던 어머니이자 이젠 황후가 된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급기야 알렉산더르에게 약혼이 가능할 것 같다면서 딸과 홈부르크에서 비스마르크 몰래 결혼하라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제시했다. 독일 궁정으로부터 지속된 압박에 지쳐서 더 이상 빅토리아와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 알렉산더르가 편지를 보내도 황후는 이 결혼을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결혼을 지지했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제 곧 황제가 될 빌헬름 황태자의 온전한 동의 없이 약혼을 진행할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딸 빅토리아 황후에게 충고했다. 황후는 아픈 남편 프리드리히 3세가 암으로 죽기전에 그가 유언에 아들 빌헬름에게 빅토리아의 결혼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조항을 삽입하도록 설득해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편지원문 프리드리히 3세가 아들 빌헬름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 Should your Mother or myself be suddenly called to depart this life, I hereby wish to state definitely that I give my full consent to the marriage of your second sister with the ex-Prince of Bulgaria, Prince Alexander of Battenberg. I charge you by the love you bear your father to carry but this, my wish, which has been the heart's desire of your sister Victoria for many years. To avoid any suggestion of politics and to obviate any political difficulties, I renounce my natural wish to grant the Prince, to whom I am greatly attached, a position in the army or any official decoration. I count on you to fulfil your duty as my son by complying with my wish and trust that, as a brother, you will not refrain from helping your sister. Your loving father.' Charlottenburg, April 12th, 1888.]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죽자 오빠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 외교관 대표를 [[헤센의 알렉산더|알렉산더르의 아버지]]에게 보내 이 결혼은 황제가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내야 한다고 전했다. 알렉산더르는 빅토리아가 준 모든 선물들을 다시 돌려주었고 작별인사를 전하므로써 5년 넘게 질질 끌던 빅토리아 공주와 알렉산더르의 약혼 문제는 끝났다. 계속된 압박 등으로 지쳐있던 알렌산더르는[* 일단 7년 동안 러시아에 맞서 불가리아를 통치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다가 지속된 암살시도와 납치, 유럽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인해 한마디로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었다. 근데 퇴위하고도 결혼 문제로 독일 궁정에서 지속된 압박을 받자 다 포기하고 빅토리아 황후에게 따님과의 결혼에 큰 뜻이 없다고 전해도 빅토리아 황후는 절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아 알렉산더르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귀천상혼|연극 배우 요한나 로이싱거와 결혼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결혼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빠져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하다가 [[섭식장애]]에 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